칼럼: 실패한 지도자의 필사적인 도박 - 윤석열의 계엄령음모와 몰락의 행로

2024년 9월 10일

윤석열 전검찰총장 대통령 부부의 지지율이 계속 급락하자, 그와 전직 나가요 부인 부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친정부 쿠데타를 일으킨다는 절박하고 무모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시위와 반대에 직면하여 권력을 유지하려 했던 절망적인 시도와 섬뜩하게 닮아있습니다

차우셰스쿠 부부 이야기는 권위주의의 위험성과 그런 정권이 국민의 뜻을 무시했을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보여주는 불길한 경고입니다. 그의 정권은 반대파에 대한 잔인한 탄압과 부패, 연고주의로 점철되었고 결국 몰락과 처형으로 끝났습니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이 역사의 교훈을 제대로 공부해야 할 텐데, 자신의 야망과 오만에 눈이 멀어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차우셰스쿠의 루마니아와 윤석열의 대한민국은 매우 유사합니다. 두 지도자 모두 충성스러운 정권 보호 기구에 의존해 권력을 유지했고, 국민의 복지와 권리는 냉정하게 무시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윤석열이 고등학교 동창들을 군의 주요 요직에 임명한 것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군 내부에 충성파를 만들려는 명백한 시도입니다.

그러나 차우셰스쿠의 운명이 보여주듯이 이 전략은 궁극적으로 실패할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군대는 신뢰할 수 있는 국민 탄압 수단이 아니며, 부패하고 권위주의적인 정권에 맞서 국민이 들고 일어날 때 군대는 궁극적으로 국민의 편에 설 것입니다. 계엄령을 선포하고 셀프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윤 총장의 계획은 재앙의 지름길이며, 결국 몰락과 처형 가능성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루마니아의 사례는 실패한 정권을 지탱하는 정권 보호 기관의 역할도 비판하여 줍니다. 차우셰스쿠의 비밀 경찰인 세쿠리타테는 잔인함과 부패로 악명이 높았으며, 반대와 야당을 탄압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윤 전임 총장이 검찰 조직에 의존하여 자신 정권을 보호하고 비판자들을 침묵시키는 것은 루마니아와 유사한 억압적인 정권 기관을 만들려는 명백한 시도입니다.

그러나 루마니아의 경험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전략은 궁극적으로 자멸할 것입니다. 국민은 침묵하지 않을 것이며, 군대는 부패하고 불법적인 이런 정권과 그들의 만행에 대해 충성하지 않을 것입니다. 계엄령을 선포하고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윤석열 전 총장의 계획은 권력에 집착하려는 필사적인 시도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몰락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차우셰스쿠 정권은 1989년 12월 티미쇼아라와 부쿠레슈티에서 벌어진 자유민주화 운동과 유혈 진압을 시작으로 붕괴했다. 티미쇼아라에서 차우셰스쿠 독재 정권의 인권 탄압과 소수 민족 차별에 반대하면서 자유민주화 운동을 지도하던 퇴케시 라슬로(László Tőkés, 1952년 - ) 목사(라즐로 토케스 목사라고도 한다.)를 체포한 사건에 대항해 1989년 12월 17일 헝가리 개신교 신도가 시작한 시위는 루마니아 노동자들과 농민들이 시위에 가담하면서 더 포괄적인 반정부 시위로 변했다. 당시 차우셰스쿠 정권은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해 많은 사상자를 내어 국가폭력으로 인민의 인권을 짓 밟았다. 당시 이란을 방문 중이던 차우셰스쿠는 급히 귀국하였다.

1989년 루마니아 혁명 당시 부쿠레슈티의 마게루 대로에 있는 탱크와 민병대 그리고 이와 대치중인 시위군중


12월 21일 12시 30분, 차우셰스쿠는 시위 사태를 진정하게 하려고 자신을 지지하는 관제 대회를 열어 인민궁전 발코니에서 대중 10만명을 모이게 하고서 연설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 연설의 내용은 경제 내용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자신을 지지를 해야 하는 이유 뿐인 내용에 불과했는데 이 관제 대회에서 뒤쪽 끝에 있는 젊은 시위대가 갑자기 야유하자 앞에 있는 군중이 조금씩 야유하기 시작했고 이윽고 모든 군중이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야유했다. 차우셰스쿠는 "여러분, 조용히 하세요!"라고 말했지만, 이 장면까지 전부 생중계되고 말았습니다. 얼마 못가 대중은 차우셰스쿠의 독재에 저항하는 시위대로 돌변하였고 차우셰스쿠 내외는 신변에 위험을 느껴 중앙위원회 건물로 대피하였다.

차우셰스쿠는 경찰만으로는 안 될 듯하다고 판단해 정규군을 출동하게 했으나 그 정규군은 오히려 시위대에 가담한다. 원인은 차우셰스쿠가 평소에 세쿠리타테(차우셰스쿠의 비밀경찰 현재 검찰 독재국가 한국의 검찰과도 같은 존재)만 편애했기에 반대파인 군부는 불만이 많이 쌓여 있었는데 이 시위를 기회로 차우셰스쿠와 세쿠리타테(비밀경찰)파를 없앨 생각이었습니다. 당연하게도 군부는 시민이 아닌 차우셰스쿠 가문에 총부리를 겨눈 데다가 차우셰스쿠의 족벌 정치로 말미암아 권력에서 소외되어 있던 루마니아 공산당원들마저 차우셰스쿠를 공산당에서 제명했고 국민과 군경이 하나가 되어 차우셰스쿠에게 재판받을 것을 통지하였다.

차우셰스쿠는 세쿠리타테(비밀경찰)로 하여금 시위대를 막으라고 지시한 결과 광장의 상황은 처참했습니다. 군중이 군경과 충돌, 수백 명이 체포되었습니다. 차우셰스쿠와 연루되기를 원하지 않았던 장군 빅토르 스탄쿨레스쿠는 왼쪽 다리에 가짜 깁스까지 하면서까지 국방장관이 되기를 거부했으나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바실리 밀레아가 국민에게 발포하라는 차우셰스쿠의 명령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세쿠리타테(비밀경찰)에게 암살당했고 루마니아 공산당 내부의 권력 서열 2위인 엘레나 차우셰스쿠의 적극 추천을 받아 국방장관이 되었다. 

루마니아 민주화 시위는 루마니아 전역으로 번졌다. 극도의 혼란 속에 시위 이튿날인 12월 22일 정부군과 경찰이 루마니아 인민의 민주화 운동에 가담해 결성된 구국 전선은 방송국과 수도 거의 대부분을 장악했으며 차우셰스쿠 친위대인 세쿠리타테(비밀경찰)와 시가전을 벌였다. 세쿠리타테(비밀경찰)는 시위대에 굴복, 중앙위원회 건물의 보호를 포기했다. 당시 국방장관인 빅토르 스탄쿨레스쿠는 차우셰스쿠를 돕지 말고 부대에 복귀하라고 군대에 명령했지만, 국방장관인 빅토르 스탄쿨레스쿠는 군인들의 민주화 시위 가담을 묵인했기에 군인들이 시위대에 대거 참여해 시위대 규모는 기하급수로 커졌으며 시위대에 가담한 군인 중에는 대령급 이상 고급군인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 누구도 자기 편을 들지 않는다는 형편을 인지한 차우셰스쿠 부부는 건물 옥상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부쿠레슈티에서 탈출해 성난 대중을 일단 피했다. 당시 이들 부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도피할 계획이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차우셰스쿠가 탄 헬기를 조종하던 중령 바실리 마루탄은 차우셰스쿠와 연루되기 싫어서 대공 사격을 당한다고 거짓말하면서 헬기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차우셰스쿠 부부는 헬기에서 내리고 중령 바실리 마루탄은 원대로 복귀했다. 헬기로 도망할 수 없게 된 차우셰스쿠는 운전수에게 도주하라고 지시했지만 운전사는 차우셰스쿠와 연루되기 싫어 엔진이 타 버렸다고 거짓말해 차우셰스쿠를 내리게 했고 두 번째로 차우셰스쿠를 태워 준 운전사는 차우셰스쿠 부부를 농업박물관으로 몰래 보냈다. 농업박물관 근처에 살던 한 농민은 차우셰스쿠가 기거하던 방을 밖에서 걸어 잠그고서 혁명 군경에 밀고하여 차우셰스쿠 부부는 12월 23일 혁명 군경에 붙잡혔으며 군사법원에 넘겨졌다. 


혁명정부 측은 그 전부터 차우셰스쿠 부부를 상대로 한 재판을 논의하고 있었으나 "잘못되면 차우셰스쿠 지지자들이 역으로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차우세스쿠 부부는 12월 25일 구국전선의 군사 법정에서 인민재판으로써 반역과 살인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차우셰스쿠의 변호사 카를로마저 검사로 돌변해 "당신 편을 들어줘야 하는 처지지만, 당신이 이 나라에 해 놓은 짓을 보시오. 편을 들어준다고 해결될 문제요? 당신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시오. 상식으로 누가 봐도, 아무리 당신에게 유리하게 설명해도, 당신이 이 나라 루마니아를 멸망으로 몰고간 것을 부인할 수가 없소. 내가 변호사로 일하면서 많은 사람을 담당했지만, 당신 같은 최악의 예는 처음이오. 나도 당신을 포기했소."라고 차우셰스쿠에게 말할 정도였는데도,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의 국민을 배려해 사력을 다했다고 우겨서 재판장에게도 크게 미움을 샀다. 

한편 소총수들은 차우셰스쿠를 죽이고자 총을 준비했고 차우셰스쿠의 처형에 동참할 사람들을 뽑기로 했는데, 지원자는 수백명에 이르렀으나 Captain Ionel Boeru, Sergeant-Major Georghin Octavian, Dorin-Marian Cîrlan 이 세명의 군인에 의해 사형이 집행된다. 이 3명의 군인들은 총 6정 총알 180발을 준비해서 '우리 그 인간 후려 갈겨버리자며' 약속을 했다. 그런데 그 군인들 소속 부대들도 총 6정 180발을 준비하는 걸 막거나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차우셰스쿠 부부에게 사형을 선고하자 둘은 눈물을 흘리더니 벽을 보고 "반역자들에게 죽음을!"이라 외치더니 사형 집행이 시작되자 공산 세력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인 "인터내셔널"을 부르기 시작하지만, 일 절이 채 끝나지도 않아 총이 불을 뿜기 시작했고 총탄 각각 160여 발을 맞고 처참하게 죽었다. 차우셰스쿠가 처형되는 장면은 공개로 이루어졌고 생중계로 진행되었다.

해병대 채해병 사고를 무마하고 이 사고 원인을 수사하던 해병 수사단장을 항명죄로 기소하여 군대내에서의 인심도 잃은 것으로 보이고 인천공항에 주재하던 인천세관원들의 마약밀수 개입혐의에 대한 마약수사마저 방해하고 내수 경제를 아예 박살내서 한국 전체 경제를 망가뜨리고 의료개혁한다며 의대 정원을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2000명 정원을 들여서 전공의 대량 사표로 응급의료 체계가 완전붕괴하여 응급실을 찾아 헤메다가 환자들이 죽어가는 아사리 판을 만들고는 윤석열이 이런 위기를 피하려고 만약 친위 쿠데타를 감행한다면 자신을 그렇게 지켜주는 루마니아의 보안경찰 같은 검찰조직이 있지만 총 든 계엄군의 무력앞에 청한번 쥐어 본적이 없는 검찰 나부랭이들이 꿈틀거리 기나 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윤가 부부의 이런 친위 쿠데타 시도가 더 빨리 더 정확하게 이들을 군사재판에서 단죄하고 빠르게 한국의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Fast track 경로가 되지 않을 까 생각해봅니다.  그러니 우리모두 윤석열의 친위쿠데타를 적극적으로 환영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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